월드 시리즈 오브 포커(World Series of Poker, WSOP)의 역사는 한 개인의 야망과 시대의 흐름이 맞물려 탄생한 거대한 서사이다. 그 시작은 1970년 라스베이거스의 한복판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그보다 수십 년 전, 먼지 자욱한 텍사스의 길 위에서 시작된다. 그곳에는 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위험천만한 불법 게임판을 전전하던 '텍사스 로드 갬블러(Texas road gamblers)'라 불리는 무리가 있었다. 도일 브런슨(Doyle Brunson), 아마릴로 슬림 프레스턴(Amarillo 'Slim'Preston), 그리고 조니 모스(Johnny Moss)와 같은 전설들은 사기꾼과 강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권총을 소지한 채 미국 남부와 중서부를 누볐다. 그들의 세계는 직관과 배짱, 그리고 생존 본능이 지배하는 거칠고 순수한 승부의 장이었다. 이 무법의 세계를 합법적인 무대 위로 끌어올린 인물은 바로 베니 비니언(Benny Binion)이었다. 댈러스에서 불법 도박, 주류 밀매, 심지어 두 건의 살인 혐의까지 받았던 악명 높은 과거를 뒤로하고 1947년 라스베이거스에 입성한 그는 1951년, 자신의 이름을 건 '비니언스 호스슈(Binion's Horseshoe)'카지노를 열었다. 그는 도박사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좋은 음식, 좋은 위스키, 좋은 도박(Good Food. Good Whiskey. Good Gamble)이라는 단순 명료한 철학 아래,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카펫과 에어컨 시설을 도입하며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낭만적인 '카우보이 대부'이미지로 세탁하는 한편, 포커라는 게임이 가진 잠재력을 꿰뚫어 보았다. 그 잠재력이 현실화될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은 1949년에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비니언의 주선으로 당대 최고의 갬블러 닉 '더 그릭'단다로스(Nick 'the Greek⟚ndolos)와 조니 모스가 5개월에 걸친 세기의 포커 대결을 벌였다는 전설적인 이야기다. 비록 이 대결의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 모스가 수백만 달러를 따낸 후 지친 단다로스가 모스 씨, 이제 그만 보내드려야겠군요(Mr. Moss, I have to let you go)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는 이 일화는, 최고의 선수들이 벌이는 승부가 대중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구경거리가 될 수 있는지를 비니언에게 각인시켰다. 그는 로드 갬블러들의 은밀한 사투를 화려한 조명 아래의 공개적인 스펙터클로 전환시킬 구상을 시작했고, 이는 1969년 '텍사스 갬블러 리유니언(Texas Gamblers Reunion)'이라는 작은 모임을 거쳐 마침내 WSOP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1970년 5월, 비니언스 호스슈 카지노에 당대 최고의 포커 플레이어 7명이 모였다. 조니 모스, 도일 브런슨, 아마릴로 슬림, 퍼기 피어슨(Puggy Pearson), 세일러 로버츠(Sailor Roberts), 크랜델 애딩턴(Crandell Addington), 그리고 칼 캐논(Carl Cannon)이 그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제1회 WSOP였지만, 오늘날과 같은 토너먼트 형식은 아니었다. 며칠간의 캐시 게임이 끝난 후, 비니언은 선수들에게 누가 최고의 플레이어인지 투표로 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널리 알려진 일화에 따르면, 첫 투표에서 7명의 선수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 표를 던졌다고 한다. 비니언이 '두 번째로 뛰어난 선수'에게 투표하라고 다시 요청하자, 비로소 조니 모스가 초대 챔피언으로 선출되어 팔찌가 아닌 은제 컵을 수여받았다. 하지만 이 첫 행사는 언론의 주목을 끌기에는 너무나 지루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기자 테드 태커리 주니어(Ted Thackrey, Jr.)는 이것을 진정한 경쟁으로 만들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하며, 언론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명확한 구조와 드라마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 비판을 수용한 잭 비니언은 아마릴로 슬림과 같은 선수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1971년부터 '프리즈아웃(freezeout)'토너먼트 포커스타즈 방식을 도입했다. 참가비 $5,000를 내고 시작해 칩을 모두 잃으면 탈락하며, 최후의 1인이 승자가 되는 이 방식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WSOP 메인 이벤트의 근간이 되었다. 단 6명이 참가한 이 첫 토너먼트에서 조니 모스는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하며 $30,000의 상금을 획득했다. WSOP가 대중적 인지도를 얻는 결정적 계기는 1972년에 찾아왔다. 참가비가 $10,000로 올랐지만, 여전히 8명의 소수 정예만이 참가했다. 경기가 도일 브런슨, 퍼기 피어슨, 그리고 칩이 가장 적었던 아마릴로 슬림, 세 명으로 좁혀졌을 때, 이례적인 거래가 성사되었다. 당시 브런슨과 피어슨은 우승으로 쏠릴 세간의 관심과 국세청(IRS)의 감시를 부담스러워했다. 반면, 쇼맨십이 넘치고 언론 노출을 즐겼던 슬림은 기꺼이 그 역할을 자처했다. 결국 브런슨과 피어슨은 자신들의 칩 가치에 해당하는 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슬림에게 우승을 양보했고, 이 '전략적'우승자는 곧바로 포커계 최초의 대중적 홍보대사가 되었다. 그는 조니 카슨(Johnny Carson)이 진행하는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를 비롯한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포커를 어두운 뒷방 도박이 아닌, 개성과 실력이 겨루는 경기로 미국 전역에 알렸다. 이처럼 WSOP의 초기 정체성은 위대한 설계가 아닌, 실패에 대한 기민한 적응과 미디어를 사로잡을 줄 아는 홍보 감각을 통해 형성되었다. 최고의 선수가 아닌 가장 시장성 있는 선수가 우승함으로써, WSOP는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아갈 첫 동력을 얻었다.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WSOP는 단순한 이벤트를 넘어 하나의 신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상징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는 바로 '포커의 대부'도일 브런슨의 전설적인 우승과 챔피언의 상징인 금팔찌의 등장이었다. 1972년, 세간의 주목을 피하고자 우승을 양보했던 브런슨은 1976년, 스포트라이트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했다. 22명의 참가자가 모여 우승자 독식으로 $220,000의 상금이 걸린 그해 메인 이벤트의 마지막 순간, 역사는 기묘한 방식으로 쓰였다. 제시 알토(Jesse Alto)와의 헤즈업 대결에서 브런슨이 손에 쥔 카드는 대부분의 플레이어가 즉시 버릴 법한 10♠2♠였다. 알토의 AJ에 비해 명백히 불리한 상황이었고, 플랍에 AJT가 깔리면서 알토는 투 페어를 완성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브런슨은 기적을 경험했다. 턴에 2, 리버에 10가 차례로 떨어지며 풀하우스를 완성, 첫 번째 월드 챔피언십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 믿기 힘든 승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1년 후인 1977년, 34명이 참가한 메인 이벤트에서 브런슨은 또다시 결승에 올랐다. 게리 벌랜드(Gary Berland)와의 마지막 승부, 그의 손에는 운명처럼 또다시 10♠2♡가 들려 있었다. 플랍에 1085가 깔려 브런슨이 탑 페어를, 벌랜드가 투 페어를 맞춘 상황에서 턴에 2가 뜨자 승부는 올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리버에 다시 한번 10이 나타나면서 브런슨은 2년 연속 같은 핸드로, 같은 풀하우스를 완성하며 우승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로써 '도일 브런슨 핸드'는 포커 역사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이 시기 WSOP의 위상을 격상시킨 또 하나의 변화는 상징물의 등장이었다. 1976년 이전까지 우승자들은 은제 컵이나 트로피를 받았지만 , 그해부터 금으로 제작된 팔찌(bracelet)가 수여되기 시작했다. 이 팔찌는 곧바로 모든 포커 플레이어가 갈망하는 최고의 영예로 자리 잡았으며, 단순한 상금을 넘어선 영원한 업적의 상징이 되었다. 1973년 CBS 스포츠의 중계 카메라가 처음으로 현장을 비춘 이래 , WSOP는 브런슨의 신화적인 스토리와 팔찌라는 강력한 상징을 통해 단순한 도박 대회를 넘어 역사와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무대로 진화했다. ​1980년대는 WSOP에 세대교체의 바람이 부는 시기였다. 텍사스 로드 갬블러라는 거친 개척자들의 시대가 저물고,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천재들이 등장해 포커계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그 중심에는 순수한 천재성의 스튜 언가(Stu Ungar)와 포커스타즈 심리전의 대가 필 헬뮤스(Phil Hellmuth)가 있었다. 1980년, 포커계는 스튜 언가라는 경이로운 인물의 등장을 목격했다. 뉴욕 출신의 이 젊은이는 천재적인 IQ와 사진 같은 기억력을 바탕으로 진 러미(gin rummy) 세계를 평정한 인물이었지만, 텍사스 홀덤 토너먼트는 처음이었다. 그는 첫 출전한 메인 이벤트에서 조니 모스가 버티고 있던 결승 테이블을 장악하고, '포커의 대부'도일 브런슨을 헤즈업에서 꺾으며 역대 최연소 챔피언에 등극했다. 그의 앳된 외모는 '더 키드(The Kid)'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언가는 이듬해인 1981년에도 우승을 차지하며 2년 연속 세계 챔피언이라는 위업을 달성, 그의 지배가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의 등장은 포커에서의 성공이 단지 오랜 경험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천재성으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또 다른 유형의 지배자가 나타났다. '오리엔트 익스프레스(Orient Express)'라는 별명을 가진 조니 챈(Johnny Chan)은 침착하고 냉정한 플레이로 상대를 압도하며 1987년과 1988년 메인 이벤트를 연달아 제패했다. 그의 1988년 우승 장면은 영화 '라운더스(Rounders)'에 삽입되면서 대중문화 속에 각인된 가장 유명한 포커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챈의 성공은 포커가 감정의 동요 없이 집중력과 반복을 통해 완성될 수 있는 과학과도 같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1989년, 조니 챈이 역사적인 3연패에 도전하던 그 순간, 포커계는 또 다른 스타의 탄생을 목격했다. 챈의 마지막 상대는 24세의 무명에 가까웠던 필 헬뮤스였다. 거침없고 감정적인 플레이 스타일을 가진 헬뮤스는 침착한 챈을 꺾고 새로운 최연소 챔피언 기록을 세우며 챈의 3연패를 저지했다. 이 승리로 '포커 브랫(Poker Brat)'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이후 포커계에서 가장 논쟁적이면서도 가장 오래 살아남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1980년대는 이처럼 다양한 챔피언의 유형을 선보이며 포커의 매력을 한층 넓혔다. 카우보이 신화에서 벗어나, 예측 불가능한 천재, 냉정한 암살자, 그리고 연극적인 악동까지, 다양한 개성이 정상에 오를 수 있음을 증명하며 더 많은 이들이 포커에 매료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1990년대 WSOP의 역사는 한 인물의 비극적이면서도 눈부신 이야기로 요약된다. 바로 스튜 언가의 추락과 부활이다. 이 시기 WSOP 자체는 폭발적인 성장 없이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냈지만, 언가의 개인사는 그 어떤 포커 테이블보다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비극의 서막은 1990년 메인 이벤트에서 열렸다. 당시 언가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엄청난 칩을 쌓으며 우승을 향해 순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회 3일째, 그는 자신의 호텔 방에서 코카인 과다복용으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병원으로 실려 간 그는 더 이상 경기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그가 쌓아둔 칩이 워낙 많았던 덕에 블라인드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버텨 최종 9위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사건은 당대 최고의 재능이 약물 중독이라는 악마와 어떻게 싸우고 있었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었다. 이후 몇 년간 WSOP는 정체기를 겪었다. 1989년 베니 비니언의 사망과 미국의 경기 침체가 맞물리면서 1992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메인 이벤트 참가자 수가 감소하기도 했다. 1991년에 도입된 100만 달러의 우승 상금은 10년 내내 유지되었고, 참가자 수는 1999년까지 400명을 넘지 못하며 더딘 성장을 보였다. 이 고요함 속에서 1997년, 포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컴백 스토리가 펼쳐졌다. 당시 언가는 파산 상태였고, 수년간의 약물 남용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친구이자 동료 프로인 빌리 백스터(Billy Baxter)가 마감 직전 그의 참가비 $10,000를 대신 내주었다. 24시간 이상 잠을 못 자고 돈을 구하러 다녔던 언가는 대회 첫날 테이블에서 졸기까지 하며 포기 직전에 이르렀지만, 친구들의 격려에 힘입어 간신히 첫날을 넘겼다. 둘째 날부터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딸 스테파니의 포커스타즈 사진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며 , 그는 전성기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엄청난 칩 리드를 안고 파이널 테이블에 진출한 그는 결국 우승을 차지하며 조니 모스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메인 이벤트 3회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언론은 16년 만의 우승을 차지한 그에게 '컴백 키드(The Comeback Kid)'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역사적인 순간을 보기 위해 몰려든 엄청난 인파 때문에 파이널 테이블이 이례적으로 프레몬트 스트리트(Fremont Street) 야외에 설치되었고, 그는 코카인 남용으로 손상된 콧구멍을 가리기 위해 상징적인 코발트색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그러나 이 동화 같은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났다. 우승 상금 100만 달러는 몇 달 만에 약물과 스포츠 도박으로 모두 탕진되었고 , 이듬해인 1998년에는 자신의 망가진 모습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백스터의 참가비 지원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1998년 11월, 그는 라스베이거스의 한 값싼 모텔에서 약물 중독으로 인한 심장 질환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포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능은 그렇게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1990년대는 WSOP의 상업적 성장세가 주춤했던 시기였을지 모르나, 스튜 언가의 삶을 통해 가장 강렬하고 슬픈 인간 드라마를 남긴 시대로 기억된다. ​2003년, WSOP와 포커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꾼 운명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이는 단 하나의 사건이 아닌, 온라인 포커의 부상, 홀 카드 카메라라는 혁신적인 기술, 그리고 평범한 한 남자의 영웅적인 승리라는 세 가지 요소가 완벽하게 결합된 '퍼펙트 스톰'이었다. 2000년대 초반, 온라인 포커는 막 떠오르는 산업이었다. 포커스타즈(PokerStars)와 같은 플랫폼들은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누구나 포커를 배우고 즐길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게임의 대중화를 이끌고 있었다. 동시에 TV 중계 방식에도 혁명이 일어났다. 1995년 헨리 오렌스타인(Henry Orenstein)이 특허를 낸 '홀 카드 카메라(hole-card camera)'는 시청자들이 선수의 숨겨진 패를 직접 볼 수 있게 함으로써 포커 중계를 단순한 추측의 영역에서 흥미진진한 심리 드라마로 변모시켰다. ESPN은 2002년부터 이 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고, 2003년에는 이 기술이 만들어낼 극적인 효과를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바로 이 무대에 크리스 머니메이커(Chris Moneymaker)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그는 테네시 출신의 27세 회계사로, 생애 첫 라이브 포커 토너먼트에 참가한 아마추어였다. 그는 포커스타즈에서 열린 $86짜리 온라인 예선 토너먼트에서 우승하여 $10,000의 메인 이벤트 참가권을 획득했다. 839명의 참가자들 사이에서 그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시작되었다. 그는 전설적인 필 아이비(Phil Ivey)를 파이널 테이블 직전에 탈락시키는 등 파란을 일으키며 결승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베테랑 프로 샘 파하(Sam Farha)와의 헤즈업 대결에서 포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가 연출되었다. 보드에 9♠2♢6♠8♠3♡가 깔린 상황에서, 머니메이커는 아무런 족보도 없는 '킹 하이'카드를 들고 과감하게 올인을 감행했다. ESPN의 홀 카드 카메라가 그의 패를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보여주는 가운데, 이 대담한 블러프에 파하는 자신의 원 페어(나인)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 '세기의 블러프'는 승부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결국 마지막 핸드에서 머니메이커의 5♢4♠는 파하의 J♡10♢를 상대로 보드에 J♠5♠4♣8♢5♡가 깔리며 풀하우스를 완성, 그에게 250만 달러의 상금과 세계 챔피언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이 모든 과정이 ESPN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방송되자, 전 세계적으로 포커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머니메이커'라는 완벽한 이름을 가진 한 평범한 아마추어가 온라인 예선을 통해 프로들을 꺾고 정상에 오른 이야기는 '누구나 월드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강력한 포커스타즈 메시지를 던졌다. 이른바 '머니메이커 효과(Moneymaker Effect)'는 실로 엄청났다. 2003년 839명이던 메인 이벤트 참가자 수는 2004년 2,576명, 2005년 5,619명, 그리고 2006년에는 8,773명이라는 정점을 찍으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03년의 WSOP는 평범한 영웅, 혁신적인 기술, 그리고 새로운 산업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포커를 시대의 중심으로 밀어 올린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머니메이커 효과로 촉발된 포커 붐은 WSOP를 역사적인 도박 이벤트를 넘어 거대한 글로벌 비즈니스로 변모시켰다. 이 시기는 규모의 확장, 기업화, 그리고 세계화로 정의된다. 참가자 수와 상금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2004년에는 그렉 레이머(Greg Raymer)가 2,576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500만 달러를 획득했고, 2005년에는 호주 출신의 조 하첨(Joe Hachem)이 5,619명이 참가한 대회에서 750만 달러의 주인공이 되었다. 포커 붐의 정점이었던 2006년에는 무려 8,773명이 참가하여 제이미 골드(Jamie Gold)가 역사상 최고액인 1,200만 달러의 우승 상금을 차지했으며, 당시 상위 12명의 선수가 모두 백만장자가 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이 폭발적인 성장은 WSOP의 운영 주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2004년,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인 하라스 엔터테인먼트(Harrah's Entertainment, 현 시저스 엔터테인먼트)가 비니언스 호스슈와 함께 WSOP 브랜드에 대한 권리를 인수했다. 이로써 비니언 가문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WSOP는 본격적인 기업 경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늘어난 참가자를 감당하기 위해 2005년, WSOP는 35년간 머물렀던 다운타운의 비니언스 호스슈를 떠나 스트립 외곽에 위치한 리오 올스위트 호텔 &amp카지노(Rio All-Suite Hotel &ampCasino)의 거대한 컨벤션 센터로 이전했다. 이는 포커 붐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였으며, 역사적이지만 비좁았던 공간에서 현대적인 대규모 시설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다만 2005년 메인 이벤트의 마지막 파이널 테이블은 옛집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비니언스에서 열렸다. 기업화된 WSOP는 브랜드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2005년, 미국 전역의 하라스 계열 카지노에서 열리는 소규모 바이인 토너먼트 시리즈인 'WSOP 서킷(WSOP Circuit)'이 출범하여 라스베이거스를 찾기 힘든 플레이어들에게도 WSOP 경험의 기회를 제공했다. 2007년에는 첫 번째 주요 국제 확장인 'WSOP 유럽(WSOP Europe, WSOPE)'이 런던에서 개최되며 사상 처음으로 미국 영토 밖에서 금팔찌가 수여되었다. 당시 18세의 노르웨이 소녀 아네테 오브레스타드(Annette Obrestad)가 메인 이벤트에서 우승하며 역대 최연소 팔찌 수상자 기록을 세우는 등 WSOPE는 수많은 화제를 낳았다. 이후 WSOPE는 프랑스, 독일을 거쳐 현재 체코의 킹스 카지노(King's Casino)에 정착했다. 2013년과 2014년에는 호주 멜버른에서 'WSOP 아시아-태평양(WSOP Asia-Pacific, WSOP APAC)'이 개최되어 브랜드의 세계화 의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이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초고액 토너먼트의 등장이었다. 2012년, 태양의 서커스 창립자 기 랄리베르테(Guy Laliberté)의 주도로 참가비 100만 달러의 '빅 원 포 원 드롭(The Big One for One Drop)'이 개최되었다. 이 자선 토너먼트는 안토니오 에스판디아리(Antonio Esfandiari)가 포커 역사상 최고액인 1,830만 달러가 넘는 우승 상금을 차지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처럼 2004년부터 2019년까지의 시기는 포커 붐의 유산을 바탕으로 WSOP가 하나의 이벤트를 넘어 전문적으로 관리되는 글로벌 스포츠 프랜차이즈로 거듭난 격동의 시간이었다. 초기의 거친 매력은 희석되었지만, 그 대가로 막대한 상금과 세계적인 명성, 그리고 장기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